내가 어떻게 살든 삶이 계속 살아진다는 것. 나는 이것이 가장 무서웠다.

언젠가 내 이야기를 글로 쓴다면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그 아찔한 기색과 조금도 더는 함께이고 싶지 않아 도피하는 마음으로, 어떻게든 살아지고 있는 나 자신을 한 올씩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건 삶은 어떻게도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것. 그 무수한 ‘어떻게’ 속에 갇히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것.

우연에 순종하라 스스로에게 선언하고,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걸음을 만들고, 설득하고, 무너지기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의외로 살아지는 삶을 산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보기엔 한 걸음이 채 되지 않을 찰나를 만년처럼 되새기던 그간의 무상한 고통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도.

살아진 삶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살아있게 된다.

찾아 헤매던 사명이 불현듯 찾아지는 것만큼이나 갑자기.

여행 이야기가 좋겠다.

언덕을 오르자 노란 눈의 맹수가 정면으로 다가왔다. 나는 수목원 입구에 방문객들을 위해 꽂아둔 막대기를 기어코 들고 올라온 넷의 실없는 소리에 지쳐가고 있었다. 어디서 끝도 없이 말이 솟아나는지 신기했다. 그것이 느리게 앞발을 내디딜 때마다 노란 털이 촘촘히 박힌 피부 가죽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두꺼운 근육 아래 고동치는 피를 숨긴 채 걷는 이는 굵게 엮인 철벽 뒤에 있어 무섭지 않았다.

핸드폰을 통해 노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그때 그것이 커다란 울음소리를 냈다. 목을 울릴 때마다 나는 소리가 가슴 언저리를 스쳤다. 내리 긁으며 뚝 떨어졌다. 소리가 고인 척추 깨에서 전율이 일었다. 벽 뒤의 맹수를 보며 신기해하는 팔자가 썩 좋았다. 좋은 것이 징그러웠다. 좋기만 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좋다고 참 좋다고 신기하다고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징그럽다. 징그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좋을 수 있는 것이, 그것이 정말 징그러웠다. 모든 것을 대상으로 만드는 것은 아주 간편해서 나는 좋음의 증폭 속에서 저녁을 맞았다.

여행을 제안한 건 윤이었다. 전날까지도 고민이 되었다. 아파서 가지 못하겠다고 할까, 역시 아직은 이른 것 같다고 할까. 일 년 만의 여행이어서인지 괜히 긴장되어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짐도 챙기지 않고 고민만 하다 늦게 눈을 감았다. 아침에 대충 가방을 쌌다. 가방 맨 위에 술을 마시다 받았지만 해본 적 없는 카드 게임 상자를 넣었다.

이번 여행 구성원 중 넷은 작년에 함께 여행을 많이 갔고, 한 번은 나와 윤 둘이서도 갔다. 둘의 여행은 지역을 옮기지는 않는 여행이었고, 그렇지만 곧 사라질 한 호텔에 가는 여행이었다. 나는 전날 백신을 맞은 바람에 저녁을 먹고 들른 친구의 바에 가서도 술을 마시면 안 되었다. 그래도 한 잔은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친구가 술을 넣지 않은 음료만 만들어주었기 때문에 마시지 못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안개가 약하게 껴 가로등의 불빛이 뿌옇게 번지고 있었다. 뭔가 기묘한데. 뭔가 기묘하네. 나는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가로등이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방에 들어와 무알코올 와인을 마시고 한 침대에서 타로 카드를 섞다 늦지 않게 각자의 침대로 돌아갔다.

새벽녘 윤은 일이 생겨 빠르게 호텔을 나갔다. 그건 윤에게 중요한 일이었는데 나는 그런 종류의 일을 아직 겪지 못해 제대로 된 반응을 하지 못했다. 지금은 나도 같은 일을 겪었지만 그것은 정말 같은 일일까. 지금이라고 제대로 된 반응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창을 가리고 있는 흰 커튼을 오래 바라보았다. 호텔이 곧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호텔 방에 누워 곧 사라질 것들을 바라보았다. 호텔이 사라져도 이곳에는 주인이 바뀐 다른 호텔이 문을 열 것이고, 그렇다면 이 호텔은 왜 사라져야 하지. 아무튼 이제 그 호텔은 없고 나는 얼마 전 호텔이었던 건물 뒷길을 차로 지나며 그 밤에 던졌던 질문을 떠올렸다. 언니, 산다는 게 뭘까. 그게 뭘까.

환은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았다. 윤이 제안하긴 했지만 여행을 계획한 건 환이었다. 부모님의 여행으로 집이 빈다고 했다. 시골이라 텃밭도 있고, 뭐 옆에 작은 공장도 있어요. 그냥 작게 하는 거예요. 원래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을 초대할 계획이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내게까지 같이 가자는 제안이 넘어온 것이었다.

일주일 쯤 전 환에게 메시지가 왔다. 굴과 가리비를 주문했는데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생굴은 못 먹고 가리비구이는 먹을 수 있다고 했더니 둘 다 굽지는 않고 찔 것이라 했다. 뭐, 파스타를 해도 되니까요. 네네, 전 다 괜찮아요. 몇 년 전 여행 때 우연히 만나 몇 개의 일정을 함께한 이후로 환을 거의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때도 말을 많이 나누지 않아 조금 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가장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환과 환이 사는 건물 라운지에 멀찍이 떨어져 앉아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내내 봉화에 가는 길이었다. 서울에서 출발이 오후 3시라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사위가 캄캄했다. 익과 규가 번갈아 운전했다.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뒷좌석에 앉아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었다. 현은 함께 문학 비평 수업을 들으며 종종 만나고 윤은 스터디를 하며 매달 봤지만 그럼에도 할 말이 많았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제 와선 잘 기억나지 않지만 현은 여행에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고, 누군가 그걸 듣고 있다. 그것이 중요하다. 우린 그런 시간을 위해 계속해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차에서 내렸을 때 우리를 반긴 건 운동장만 한 텃밭이었다. 마당이 넓어 집 쪽에 켜진 불이 입구까지 닿지 않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검은 하늘을 가득 메우는 별이 있었다. 낮게 뜬 반달이 밝았는데도 아랑곳없이 밝게 빛났다.

나는 그 순간 무엇인가 깨달았다. 그건 올해의 모든 것을 뒤집는 종류의 감각이었다. 지금 하늘에서 빛나고 있는 별이 진짜고, 폐 속으로 차갑게 스미는 공기가 진짜고, 얼어 식은 손등 온도가 진짜고, 레몬즙과 올리브유와 후추를 뿌려 크림 맛이 나던 신선한 굴이 진짜고, 깊은 밤 여섯 명의 친구가 함께 걸은 텅 빈 도로가 진짜고, 반으로 쪼개진 채 마을 앞에 서 있던 거대한 바위가 진짜고, 이른 아침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를 피해 마을로 뛰어 들어갔던 것이 진짜고, 회사는 가짜, 사회가 가짜, 내가 내게 부여한 역할이 가짜, 살고 있다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허상이었다.

이 얘기를 하자 누군가 칸트의 묘비명에 하늘에 뜬 별 같은 게 나온다고 했다. 나는 칸트의 묘비명을 검색해 보았다.

Zwei Dinge erfüllen das Gemüt mit immer neuer und zunehmender Bewunderung und Ehrfurcht, je öfter und anhaltender sich das Nachdenken damit beschäftigt: 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

내가 그것에 대해 자주, 그리고 끊임없이 사색할수록, 마음을 항상 새로운 경이와 경외로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내 머리 위의 별이 가득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내 안의 도덕 법칙은 잘 모르겠고…. 나는 아무래도 이 순간을 오래 기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뜬금없게도 넷의 실없는 소리가 영원했으면, 누군가 곁에서 지치지 않고 그 소리를 영원히 듣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덜 익은 가리비 구이를 먹을 수는 없어 찐 것을 많이 많이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