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여선 작가가 이모인지 고모인지에 대해 쓴 소설을 소설 수업에서 만났다. 나는 나이 든 여자가 나오는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 왔는데, 젊은 작가들이 썼거나 작가가 젊을 때 쓴 작품을 주로 읽어서이기도 하고, 여자가, 특히 나이 든 여자가 주인공인 소설이 많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아마 고모였을 것이다. 나이 든 여자가 삶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영위하는 이야기였다. 집에 불필요한 짐을 두지 않는다. 그날 먹을 것을 장 봐 와 간단하게 식사한다. 불확실성 속에서 날뛰는 감정과 통제 불가능한 충동들을 억누르며 살아가는 나의 삶과는 다르기 때문일까. 나이 들어 부질없는 것들을 부질없이 볼 수 있게 되고 간결한 삶의 양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면 이 어설픈 연극을 그만할 수 있는 걸까. 간결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애초에 모두에게 가능한 걸까.

규칙적이고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하는 담백하고 건조한 태도는 속절없는 세월에 맞서 어떤 방비를 한 것처럼 단단하게 느껴졌다. 어쨌든 그 소설을 읽으며 나는 작은 희망을, 세월이 내게서 무엇인가 앗아가는 만큼 주는 것도 있지 않겠느냐는 희망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하다.

밤새 글을 쓰는 모임에 갈지 말지 종일 고민하다 결국 가지 않기로 했다. 모임 장소가 너무 멀기도 하고, 당장 쓸 것도 없었다. 절절한 연애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지만 —그래서 보지 않고 아껴 두었던 영화 <첨밀밀>도 봤지만, 왜인지 집중이 잘되지 않았고 차 안에 앉아 핸들을 붙잡고 붉게 칠한 입술을 깨무는 장만옥 얼굴만 자꾸 떠올랐다— 지금으로선 이 얘기를 누구에게 했는지도 잘 모르겠다. 쓸 것도 없는 와중에 무엇이든 열심히 쓰는 친구들을 견딜 자신도 없었거니와, 모임 비로 낼 현금 만 원이 없었다. 나는 손품이나 발품을 팔지 않고 무턱대고 결제부터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소비 습관으로 —주로 웹서비스 이용 요금이거나, 보는 시간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른 콘텐츠 플랫폼 구독료거나, 신청만 하고 듣지 않는 소프트웨어 강의 비용이거나, 친하지는 않지만 생일을 맞은 누군가에게 날릴 기프티콘 비용이었기 때문에 내게 물질적으로 남는 것은 조금도 없었다— 모든 비상금과 현금을 카드값을 메꾸는 데에 쓰고 있었다. 드디어 이번 달에는 지갑에 넣어두었던 현금마저 카드값에 보태 이제 정말 단 돈 만 원도 없는 형국이었다. 몸 상태도 좋지 않았으니, 몸과 마음과 지갑 형편을 생각했을 때 가지 않는 것이 합당했다. 물론 모임에 나가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근황을 나누고 싶기도 했지만, 나의 근황은 또 공유할 만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집에 있는 것이 아무래도 나았다.

이 고민을 하면서 책을 딱 한 권만, 아니 단편 소설을 딱 한 편만 읽고 결정해 보자고 한 것이다. 교보 전자도서관 앱에서 한국소설을 선택하고 권여선의 <각각의 계절>을 고른 것이다. 책을 내려받고 나니 처음으로 배치된 소설 <사슴벌레식 문답>은 제목도 익숙하고 도입부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목차를 읽다가 <무구>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앞의 세 편의 소설을 건너뛰고 읽기도 했다. 무구라고 해서 무속에서 쓰는 도구를 말하는 줄 알았는데, 허물없음을 뜻하는 무구였다. 허물없음을 뜻하는 무구는 최근 내가 뽑은 주역 괘사에 나왔다.

恒 亨通 无咎 利貞 利有攸往

항 형통 무구, 리정, 리유유왕

항괘는 형통하여 허물이 없으니 올바름을 굳게 지키는 것이 이롭고 가는 바를 두는 것이 이롭다.

뇌풍항이라는 괘다. 몇 주 내내 아침 출근길마다 괘사를 혀끝으로 굴리다 보니 결국 외워버렸다. 나름의 화두로 삼아 자꾸 되뇌다 보니 저절로 외워졌다. 올바름이란 무엇인가, 가야 할 바는 어디인가, 무엇을 지속할 것인가. 이 세 가지 물음에 아직 대답할 수 없어 나는 방황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어쩌면 이 괘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허물없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무구>를 읽으며 나는 세월을 치른 나이 든 여자를 또 한 번 만나게 되었다. 그 여자의 외로움에, 목욕탕 베드에 모로 누워 세신을 받으며 젊은 날을 그리워하며 우는 사무치는 외로움에 괴로워졌다. 어떤 물질적 풍요도 날 선 채 세상을 마주하던 그때를 돌려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이 든 여자는 내가 이 글 도입부에 쓴 그 여자와 같이 아무도 모르게 울고, 외로워하고, 그러다 그런대로 다시 살아갈 것이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살다가 이내 그 외로움도 흘려보내고 혹은 주름진 신체 어딘가 숨겨 품고 홀가분하게 이 세상을 뜰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이 처절한 외로움을 이고 지고 사는 것이구나. 이런 것을 전하는 사람이, 사건과 묘사로 표현하는 사람이 소설가구나, 생각했다.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소설을 쓴다면 이런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럼 남들보다 더 많이 외롭고 너무 외로워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게 예순 정도 나이를 먹어 통제할 수 있다 겨우 여기게 된 생활을 비집고 돌출하는 외로움을 부여잡듯 소설을 써야 하는 것 아닐까.

단편선의 마지막 소설 <기억의 왈츠>를 읽으면서는 아무것도 없고 자의식만이 가득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라 너무 부끄럽고 괴로웠다. 하지만 소설 끝에서 화자는 그 부끄러움을 대면하게 했던 사건들의 이면을 다시 바라보고, 그로 인해 무無를 치장하던 자신의 삶에서 거추장스러운 무게를 덜어내고, 삶이 준 기회를 기회 자체로 받아들이고, 무無로부터의 한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니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소설인 것 같아 좋았다. 내가 이런 것을 담고, 전할 수 있는 작가라면 좋을 것 같다. 좋을까? 소설가는 겪은 만큼, 또 그렇게 살아가는 만큼 쓸 수 있는 건가?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괜찮은 걸까? 나는 무엇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내딛을 한 발짝을 붙들고 웅크리고 있는 걸까.

소설은 덮고 넘어가지지 않는 무시무시한 진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같은, 하지만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내가 아닌 척하고 남들도 아니겠거니 하며 사는 모습으로 가려진 진실을 선명하고 명료하게 지면에 펼쳐내는 것인가. 문학 비평 수업을 들을 때 ‘진실성’에 대한 지겨움을 이야기했던 것도 같은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진실이란 무엇이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진실에 대해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왜 소설을 쓰지도 않으면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 역시 어떤 진실의 순간들을 몸으로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이든 결국 쓸 수는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 뻔했다.

어쩌면 내가 진실을 가리기 위해 끌어 쥐고 있던 모든 거짓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이 내가 지금 쓸 수 있는 진실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고백하기에는 너무 무서운 진실. 이 책을 다 읽고, 또 나를 무너지게 하는 소설들을 더 읽고, 소설은 이런 것이지 하는 생각을 여러 번 더 하면 쓸 수 있을까.

소설가가 되지 않더라도 소설은 쓰기로 다시 다짐해 본다. 나의 진실을 감당하고, 감당할 수 있는 형식으로 드러내 보이는 것, 그것이 줄곧 글을 쓰고 싶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이런 생각도 한다. 소설가는 독자를 화자가 있는 곳으로 단숨에 데려가는 사람, 예를 들어 <무구>의 만둣국 가게로, <기억의 왈츠>의 숲속 식당으로, 화자의 기억으로 단숨에. 그리고 소설은 화자의 기억과 경험을 독자가 다시 겪게 하는 것, 독자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인지할 새도 없이 침범하는 것, 그렇게 독자가 실제로 겪은 일을 변형시키는 것, 실재의 힘을 가진 것.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것이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기억의 왈츠> 중)

권여선의 소설 속 여성들은 얼마간의 자본을 주체적으로 획득하거나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점도 좋았다.

하늘 아래 모든 소설을 읽고, 또 내가 훌륭한 기준으로 그 소설들을 줄 세워 좋은 것을 명석하게 판명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만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게로 와 피부에 닿는 소설들을 경탄하는 마음으로 읽기로 했다. 겨우내 간신히 나무에 붙어있다 떨어지는 낙엽 한 장이 신음 내듯이. 소설이 의도한 바에 나를 맡기고 나의 의도는 내려놓기로 한다. 그에 나는 세상의 줄 세우기에 밀려날지라도 지금 읽는 소설을 맨눈으로 마주하는 기쁨을 철저히 누리기로 한다. 허물없이 읽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