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을만한 날씨일 때는 광화문 광장까지 걷는다. 폭우와 폭염이 반복되는 요즘은 걸을만한 날씨라고 하기에는 너무 높은 기온과 습도이긴 하지만, 비가 오지 않는 정도면 충분하다. 아직 지지 않은 볕 아래를 걷다보면 에어컨 바람으로 식어있던 몸에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열이 차고 땀이 흐른다. 옷이 젖어들어 가는 것이 느껴지면 오히려 체념하는 마음이 된다. 이런 것은 견디기 어렵지 않다. 특히 혼자 걸을 때는 더 그렇다. 몸의 상태를 쾌적하게 유지하기 보다는 감각의 대상이 외부를 향해 있는 것에 집중한다. 빛의 농도, 공기의 밀도, 팔에 닿는 뜨거운 바람과 열기에 익어버린 콘크리트가 풍기는 냄새, 길에서 혼란스럽게 부딪히는 사람들의 부피, 저마다의 태도로 길에 머무는 비둘기까지 모든 요소들이 감각하는 대상이 된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이런 시간이 없을 때다. 신체나 외부 현실 어디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감각하려는 의도가 해소되지 못하고 가득 차있는 상태로 하루가 끝날 때. 그런 날은 퇴근 길 지하철, 내려서 걷는 구간, 샤워를 하고 자리에 눕기까지 일련의 과정들이 시간을 단축한 듯 빠르게 전개되지만 그만큼 숨이 밭게 쉬어진다. 불을 끄고 응축된 타인의 시간을 헤맨다. 불편한 신체를 감각하는 것을 미룬다. 해야하는 것을 하지 못한 기분으로 꿈을 꾼다. 멀리 걷지 못하고 막막한 꿈.

사무실 옆 동으로 이어진 대로로 나오면 광화문 광장으로 가는 길은 세 갈래 정도로 좁혀진다. 공예박물관 쪽으로 길을 건너 경복궁 담을 따라 이어진 길은 날이 추운 2월에 많이 걸었다. 달이 애매하게 걸친 하늘을 보며 산울림의 <회상>을 듣는다.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 (중략) 달빛이 숨어 흐-느끼고 있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을 잃은 기분으로 담 아래를 걷다 보면 싸늘한 바람에 코 끝이 시리고 그러면 조금 더 노래와 같은 기분이 되어 쓸쓸하게 걸을 수 있었다. 잃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보다는 무엇인가 잃고도 모를 수 있다는 우월감에 젖은 채로 걷다 경복궁 역이 나오면 지금 지하철을 타서 반대로 되돌아갈까, 환승하지 않아도 되는 역까지 조금 더 걸어갈까 하는 현실적인 고민을 한다. 지금 지하철을 타면 이 무드를 잃고, 조금 더 걸어가면 추위를 견뎌야 하는데 결국 어떤 것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회상>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광화문 광장을 확장하는 공사가 마무리되고 경복궁을 둘러싼 담 앞으로 공사 범위가 바뀌었을 때쯤에는 그 길로 걸어다니는 것을 멈추었다. 대로가 보이지 않는 길은 회상을 듣지 않아도 왠지 삭막했고, 느리게 지는 해를 머금어 뜨거워졌다.

두 번째는 광화문 광장을 향해 쭉 직진하는 길이다. 이제 반쯤 부서진 종로경찰서를 지난다. 매일 저녁을 여기서 해결해야지 하고 저녁엔 한번도 가지 않은 서브웨이를 지난다. 여기서 구찌가 경복궁 패션쇼를 끝내고 에프터 파티를 했지 (나는 그때 야근을 하고 퇴근하던 중이었고, 웬일로 건물과 연결된 지하철역으로 내려가지 않고 버스를 타기로 했으며, 빛과 소음이 요란한 이 건물을 보게 되었다) 하는 흰색 프레임의 빌딩을 지난다. 늘 경찰과 펜스가 서 있는 트윈트리타워를 둘 중 어디에도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난 후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린다. 사람이 허리를 살짝 굽혀 이마에 손을 대고 들여다보기에 적합한 위치에 투명한 아크릴로 막은 구멍을 뚫어 놓은 공사 가림막이 보이면 위로 돌아갈지, 아래로 내려갈지 선택해야 한다. 위로 돌아가면 괜히 투명 아크릴판 너머를 힐끗 들여다보았지만 건물 기반이 되는 주춧돌을 보며 여기엔 뭐가 있었을까 하며 상상으로 이어지지 않는 짧은 생각을 했고, 그것이 의정부터였다는 것은 지금 지도 검색을 하며 알게 되었다. “1400년에 설치된 의정부는 조선시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삼정승이 국정 전반을 논하던 최고의 행정기관이자….”(서울시 보도자료) 담 위에 1미터가 넘는 크기로 의정부라고 쓰여 있지만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의아했다. 그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백관을 총괄하고, 서정을 평리하며, 음양을 다스리며, 나라를 경륜하다.”

글 바로 아래서 아직 퇴근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회사원들이 (목에 사원증을 건 채로) 담배를 피운다. 의정부터발굴현장 아래 편으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불가피하게 통과해야하는 풍경이다. 담배를 피우는 골목을 지날 때면 숨을 참는다. 숨을 참고 걷는 동안은 발 아래만 본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보며 숨을 들이마시지 않으려 애쓰느라 발굴현장을 두른 펜스에 눈길이 닿지 못한 것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물을 향해 도로를 건널 때에서야 숨을 내쉰다. 이제 박물관을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면 광화문 광장으로 들어설 수 있다.

괜히 경찰 수십명과 늘 경찰을 가득 채운 채 세워진 경찰버스를 지나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일찍이 발길을 돌려 조금 짙푸르러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최근 발견한 세 번째 길이다. 몸에 좋은 재료들만 써서 먹어도 몸이 편안한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 집과 어깨동무를 하고 회식하러 들어서는 (왠지 이미 취해보이는) 직장인들을 지나면 비교적 나무들로 우거진 길로 이어진다. 신발에 흙이 묻은 듯 타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돌 바닥을 조금 더 걷다 보면 왼쪽으로 사찰 같아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눈에 띈다. 어느 저녁에는 안쪽에서 은은하게 쏟아지는 빛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커다란 나무 밑에 네 다섯의 사람이 편의점 앞에 있는 간이 의자를 두고 앉아 앞과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를 보니 나무 줄기를 따라 연등이 총총히 달렸다. 이곳이 서울인 것도, 퇴근길인 것도 잊는다. 대웅전 곁을 따라 걸으니 세 칸이 모두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부처님이 보였다. 금빛으로 현현했다. 부처를 만났으니 절을 할까. 누군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을 알려주었는데, 부처를 죽이는 대신 절을 할까 하는 마음을 죽일까 생각했다. 문득 앞을 보니 안녕인사동 빌딩과 도로가 보였다. 조계사 안이었다.

다시 인사동 쪽으로 갈 수는 없어 되돌아 나와 골목을 타고 내려오면, 흰 와이셔츠 또는 피케 티셔츠에 검은 슬랙스를 입은 직장인들을 우루루 지나게 된다. 그 가운데 나만 연보라색 반팔 니트와 청록색 바지를 입고 있다. 철지난 하지만 아직 입을 수 있는 (바지 단추는 다시 달았지만) 옷을 입고 걸으며 또 다시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져든다. 나는 회사원인가, 세상과 인간과 나를 알고 싶은 예술가인가. 어느 날부터 그 경계를 확실하게 구분하고 싶어서, 또는 모호하게 봉합하고 싶어서 예술가-근로자라는 단어를 쓴다. 근로자-예술가가 아닌 이유는 근로자의 영역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예술가로서 하는 일이란 생각하고, 감각하고, 글을 조금 쓰는 것이 다여서 반대로 하기에는 부채감이 있었다. 안 쓸수도 없는데, 그건 내가 찾고 싶은 예술의 정의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분명한 건 그 어느쪽에도 확실하게 속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근로자 무리를 지나면 정면으로 ‘사랑이 뭐길래’ 간판이 나온다. 1992년 作. 마치 작품처럼 간판에 ‘작’자가 붙어있다. 가게를 연지 30년이 지난 지금 이 가게의 주인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냈을까. 가게 이름을 검색하다 이 간판을 보고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는 사람의 블로그 글을 발견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제 공격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사랑이 뭐길래(https://blog.naver.com/yoniloging/222969763526) | 작성자 sooooyoni) 가게 주인은 적어도 ‘사랑이 뭐길래’ 외치는 사람들의 사연은 많이 수집했을 것이다. 옆 건물 모퉁이에 닭이 돌돌거리며 구워지고 있었다.

이제 광화문 광장 쪽으로 꺾으면 이미 광장의 3분의 1은 놓친 후다. 세종문화회관 외벽의 미디어 파사드에서 뿜어 나오는 불빛이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응결된 안개 사이로 아른거린다. 안개 속을 헤치면 가로등의 불빛이 휘황하게 빛난다. 물 알갱이를 지나며 굴절, 안경알을 지나며 굴절.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를 입은 중년 여성들 중 한 명이 내 앞을 가로막고 묻는다. “지하철.” 묻는 건가? 나는 대답한다. “저 앞으로 쭉 가면 있어요?” 대답한 건가. 반응을 보지 않고 그들을 지나친다. 분수 뒤에 놓인 벤치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걷는다. 광화문 광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