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밤을 걷는다. 어둠이 내린 길 위에 보송한 잎들이 풍성하다. 군집을 이루는 풀잎들은 푹신하고 두터운 쿠션 역할을 한다. 매섭게 우는 매미 울음을 가둔다. 검은 빛을 마시고 내뿜는 숨이 선명하다. 장마가 지난 뒤 얕게 흐르기 시작하는 홍제천 표면에 가로등 불빛이 반짝인다. 풍경 중 그 빛이 유일하게 요란하다. 지열이 식지 않은 다리 아래를 왠지 긴 팔을 입고 달리는 자전거가 한 대. 두 대. 수면에 닿을 듯 내려앉은 사뿐한 잎. 고요히 뻗는 줄기.

한 친구가 꽃이 만발한 봄 길이 아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식물들이 풍기는 생식 욕구가 그렇게 만든다고 했다. 내게는 여름이 그렇다. 무서운 속도로 자라며 난간을 덮고 벽을 덮는 식물 때문이다. 그 사이를 걸을 때면 온 힘을 다해 공중을 가르는 식물들의 생기가 마음을 어지럽힌다. 근육을 찢고 푸른 뼈가 자라는 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나는 생장이라는 유혹 앞에 맥을 추리지 못한다.

어제는 증명사진을 찍었다. 회사에서 곧 있을 행사 패찰에 넣을 사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조금 이상한 사진들을 제출했다. 오래 전 찍은 증명사진과 그 해 생일 집에서 찍은 사진을 냈다. 둘 다 내 사진이지만 패찰에 인쇄된 것을 보니 위화감이 들었다.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고, 디지털 파일일 때와 플라스틱에 인쇄된 것이 달랐다. 제출 마감기한은 월요일까지였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집 근처에서 찍기로 하고 지도 어플을 뒤졌다. B가 운영하는 바 뒤 편에 마침 사진관이 있었다. 오며가며 보았던 창문에 식물이 가득한 2층이었다.

—저… 증명사진 찍으러 왔는데요…

예약시간보다 3분 늦게 도착했지만 사진관 주인은 만면에 미소를 띄며 반겨주었다. 카라멜 색 뿔테안경을 끼고 베이지색 배레모를 쓰고 어스 컬러 톤의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와 반대로 편안함을 몸에 장착하고 사는 사람인 듯 했다.

— 스프레이 픽서로 머리 위쪽을 살짝 눌러주세요~!

— 됐나요?

— 옆쪽도 같이 정리해주세요~!

— 됐나요?

반사판을 얼굴 아래에 두고 자리에 앉으니 긴장되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는 것은 좋아하지만 찍히는 것에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 웃음을 터뜨리며 편안하게 대화하다가도 사진관 주인 얼굴이 카메라 뒤로 숨으면 입꼬리가 굳었다. 얼굴 전체에 땀이 맺혔다. 이가 보이면 좋을 것 같아요. 이가 보이게 웃는 것을 반복해서 시도하다 그만두었다. 얼어붙은 표정. 다시 빵 터진 표정. 중간이 없네요.. 그는 나를 찍기를 포기한 듯 했다. 잠깐 이리 나와서 서 보세요. 네...

흰 배경에서 나와 스튜디오 안쪽의 조금 편안한 분위기로 조성된 공간에 사진관 주인과 마주본 채로 나란히 섰다. 사진을 찍을 때는 온 몸을 각각 분리해서 써야해요. 실제로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나를 가장 매력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포즈로요. 사진관 주인은 내 얼굴 각도와 시선부터 분리하더니, 하체를 90도, 180도, 270도로 세웠다가, 목을 돌리고 상체를 회전시켰다. 연기하는 거죠. 사진과 별개로 사실 우리는 늘 연기하며 살고 있잖아요. 오늘 처음 만난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것과 절친한 친구에게 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요. 그걸 알아차리고만 있으면 화를 낼 때도 몸은 흥분하지 않은 채로 연기할 수 있어요. 표현은 하되 내게 분노가 스며들지는 않는 거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을 때는 발과 상체와 팔과 시선이 모두 한 방향이었다. 아무래도 증명사진을 찍으러 온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앉아있으니 5월 쯤 읽었던 김신록 배우의 책 <배우와 배우가> 속 ‘사츠 Sats’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사츠에 대해 처음 제시한 덴마크의 연출가 바르바는 자신의 책 <연극 인류학>에서 “행동보다 앞서는 순간에, 필요한 모든 힘이 공간 속에 펼쳐질 준비가 되어 있지만, 보류되어 아직 고삐가 묶여 있을 때, 배우는 자기의 에너지를 사츠의 형태로, 즉 역동적인 준비의 형태로 체험한다”고 저술한 바 있다. 김신록 배우와 양종욱 배우의 대담을 좀 더 읽어보면 사츠는 ‘연기하는 것을 인식하고 다음 행위를 선택하는 극적인 동시에 정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다.

신체가 기민해지고 감각이 고양되어 응축된 상태, 다음 행위를 위해 에너지를 모았지만 아직 특정 행위를 하지는 않은 중립적인 상태, 모든 것의 배경이자 사건의 장이 될 수 있는 상태. 어떤 것이 잠재적인 상태로 존재함을 인지하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찰나. 그러니 나를 담는 카메라에 집중하지 말고 몸의 긴장 상태를 풀어보자..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신체를 다루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양종욱 배우와 김신록 배우는 이어 훈련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강도가 높은 사츠를 경험한 이후에야 섬세한 사츠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증명사진은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표정으로 찍혔다. 다만 몸에 찬 긴장은 잔뜩 인식했다. 어쨌든 사진관 주인의 포토샵 실력이 굳은 표정도 자연스럽게 만들 정도로 훌륭해서 다행이었다.

사진관을 나오며 보니 맞은 편에 있던 카페가 다른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들어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없이 와인잔에 든 음료를 마시는 사람이 하나. 둘. 좋은 주말 되세요 인사에 같은 말로 화답하며 카페를 나왔다. 같은 골목을 걷는 것도 2년이 넘었다. 2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익숙하게 방문하는 카페와 식당, 즐겨 찾는 바와 미용실, 마트, 책방이 있다. 직접 커피를 로스팅한다는 사진관 주인을 만났다. 언젠가 동네 사람들과 알고 지낼 수 있는 골목에 사는 것을 꿈꾼 적이 있는데 꼭 지금이 그렇다. 혼자 걷던 길에서 이젠 반가운 파사드를 마주한다.

생장이란 무엇이 될 지 모르고 크는 것이다. 목적 없이 뻗는 것이다. 바람없이 이루는 무의지적 성취다. 우리 동네에는 악기를 다루는 학원이 많다. 가끔 기타 학원 옆을 지나갈 때면 기타가 배우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집에 기타가 생겼으니 그게 좋을 것이다. ‘난 원래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고 적힌 피아노 학원 앞 작은 간판 옆을 걸을 때는 피아노가 배우고 싶다. 일곱 살의 작고 긴 손가락에게는 건반이 무거워 연필로 그린 포도알에 한 번 연습하고 두 번 색칠하고 나오던, 눈에 띄는 곳을 모두 들리고 담을 타 넘느라 10분도 걸리지 않는 학원까지 1시간이 걸리던 그 때와 달리 지금은 건반을 쉽게 누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무엇인지 모를 글을 쓴다.

가만보면 나도 스스로의 생기에 어지러운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아까워 살던 집과 가까운 안양천을 달렸다. 한밤을 달리다 보면 한강이 나왔고, 건너편을 수놓는 불빛이 보였다. 지금은 건너편의 한강이 집과 더 가까워졌고, 조금 더 가벼운 마음과 지친 몸으로 한강엘 간다. 뛰지 않고 간다. 맥주를 들고 앉아 건너편을 본다.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을 쥐고 달리던 길을 바라보곤 한다. 지난 여름과 짙은 생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