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미션은 20분이었다. H에게 티켓을 건네주고 볼펜을 빌려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자리에 꼿꼿이 앉아 손이 터져라 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줄지어 밖을 향했다. 라임색 별색이 인쇄된 팸플릿 앞면에는 피아니스트 듀오, 무용 연출이자 발레리나, 발레리노 두 명, 안무가가 아치형 테두리 안에 녹색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안무가만 갖고 있던 사진을 냈군. A4 용지를 오른쪽 3센티 정도를 잘라낸 듯 조금 길쭉하고 빳빳한 종이를 앞뒤로 살피다 무릎 위에 뒷면을 두었다. 공연 1부에 대한 감상을 붙잡아 두려 끄적거렸다. La Valse. 알 수 없는 몸짓과 이해하지 못한 음들. 외계의 언어로 하는 대화. 반짝이는 건반. 건반이 채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손. 온몸으로 연주함. 공연이 끝나고 H는 La Valse가 프랑스어로 왈츠를 뜻한다고 알려주었다. 라 발스. 이거 왈츠래.

고개를 드니 스텝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무대 한켠에 알전구가 여럿 달린 화장대와 스탠드 옷걸이가 설치되고 있었다. 양편에 건반이 모두 달려 피아니스트 듀오가 마주보고 앉아 연주하던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는 무대 뒤쪽에 자리 잡았다. 희고 검은 옷을 입은 발레리노 두 명이 무대 중앙에 올라 몸을 풀었다. 검고 흰 타이즈가 단단하게 덩어리진 허벅지 근육을 부드럽게 감은 채로 늘어났다 수축했다 다시 늘어나기를 반복했다. 길다란 양팔을 활짝 벌리고 턴을 하다 비틀, 왼쪽 발끝을 뒤로 뻗다 움찔. 리허설을 관객들이 앉아 있는 무대 위에서 할 이유가 있나. 이리저리 균형을 잃는 것이 무대 위에 설 준비가 덜 된 듯했다. 가벼운 실망이 일었다. 들뜬 것이 실망감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금 놀랐다. 해발고도 800m의 산골짜기에서 피아노 연주와 발레 공연을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자신도 알 수 없는 기준을 충족해 줄 완벽한 공연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레리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을 보다 일어나 튀튀를 입고 토슈즈를 신었다. 대관령 야외공연장은 규모가 크지 않은 무대를 포함해 아주 많지는 않지만 사람 많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은 충분해 보이는 좌석이 군더더기 없이 들어차 있었다. 천장에는 목재 같아 보이는 음향판이 물결치듯 매달려 불안하게 흔들리는 울음을 들이마시고 깨끗한 선율을 뱉었다. 대기실이 없을 리가 없을 텐데, 왜 무대 위에서 저러고 있는 거지? 쉼 없이 약동하는 신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와중에 뎅- 뎅- 2부 공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몸을 뻗으며 무대를 누비던 발레 무용수들은 관객들을 등지고 허리를 굽혔다. 공연이 끝났다. 백스테이지가 시작되었다.

건조한 실내 공기에 눈이 조금씩 뻑뻑해져 오기 시작했다. 여름의 열기 속에서 뿔테 안경을 쓰고 있을 자신이 없어 렌즈를 낀 탓이었다. 가는 금속으로 된 안경은 얼마 전 집을 나서는 길에 오른쪽 알이 달그락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짙은 회색빛을 띠는 물웅덩이 위로. 나는 급히 가야 할 곳이 있었고, 돌아오는 길에 알을 찾아보려 하다 그만두었다. 비가 그치고 땅이 말랐지만, 마른 땅에 검은 것이 묻어 있을 안경알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각적 역치가 매우 낮은 편이다. 그래서 아무런 것을 찍고, 아무런 것에 잘 감탄한다. 대신 어떤 것은 보기만 해도 기도가 조이는 것 같고, 어떤 것은 제대로 보기도 전에 각막을 베며 스친다. 그 안에서도 가끔 아름다움을 찾는다. 늘 같은 층위로 돌아와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것이 내가 적확한 비평을 할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대중의 역치와 사회의 역치를 모르는 것. 하지만 그것은 예술의 미덕이기도 했다. 무엇이든 아 름 다 울 수 있다. 있나?

청각은 꽤나 민감하긴 하지만 청력이 아주 좋진 않아 조금 상쇄되는 면이 있다. 신체적인 능력이 역치를 높이는 것이다. 프란츠 슈베르트의 환상곡 F단조, 도이치번호 940이나 모리스 라벨의 라 발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모두 내가 모르는 곡이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감각을 더듬으며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동안 저 스스로도 친밀하지 않은 음들이 피부를 때리며 지나갔다. 앞선 음을 붙잡으려 할 새도 없이 다음 음들이 쏟아졌다. 입을 보며 말을 유추하는 것도 할 수 없이 무력했다. 아주 미지의 세계는 오랜만이었다. 가파른 음역 속에 휩쓸리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이해하려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지금 아주 대단한 사치를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 없이 느낄 자유. 광대한 욕심이지만 누구도 탐내지 않고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래서 아주 안전하고 비밀스러운 나의 욕망은 반짝이는 튀튀를 비추며 검게 빛나는 그랜드 피아노의 옆판을 미끄러질 뿐이었다. 나는 영원히 나의 사치를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나고 밖에 나오니 온통 깜깜했다. 꼭대기까지 불이 밝혀진 비탈진 잔디 위로 총총 뜬 별이 가득했다. 인터미션 때 나갔다 온 H가 알려준 공연 만족도 설문조사를 하고 스티커와 볼펜을 받았다. 스티커는 어디에도 붙여지지 않고 책꽂이 사이에 끼어 있다 이런 걸 받았었나 하는 소리를 듣겠지만 검고 단단해 손에 잘 붙는 볼펜은 자주 들고 다니며 쓸 것 같았다. 어쩌면 내일 만날 J와 M이 모레 아침 잠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여행은 어땠니 혹시 지루하진 않았니’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자마자 속삭이듯 들린 한 마디다. 유튜브 자동 재생으로 플레이 된 3호선 버터플라이의 노래다. 2010년 전 정규앨범 리마스터링 버전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봄의 제전 & 신박 듀오, 김지영, 이제우, CONCERT 18, 제20회 평창대관령음악제, 대관령 야외공연장 Music Tent, 2023. 08. 04(FRI), 07:30pm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