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실래요?”

부탁 자체를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좋아하기 때문에 못 하는 거절 중 하나가 바로 산책이다. 오로지 맨몸에 의지해 팔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싶다. 많은 사람이 산책에 대한 장점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어떻게 걸으면 더 좋은지(가령 맨발로 걷는다던가)에 대해 설파한 것을 보면 나만 좋아하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떤 과학자는 사람의 신체가 움직이기 위해 설계되었다고 한 바 있고, 걸을 때 움직이는 모든 근육을 가능한 만큼이라도 의식했을 때는 한 발짝 떼는 것조차 얼마나 많은 명령과 공정이 필요한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걸 보면 걷기란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본질적이며 아름다운 운동이 아닌가 감탄하게 된다. 인간이 처음 걷는 것에 얼마나 기뻐하는지 보라. 산책은 어떤 이와 하는지, 또 어떤 시간에 어디에서 하는지에 따라서 아주 다르기도 하지만, 그 모든 조건이 어떻든 몸에 새로운 바람이 스며들고 생기가 돌기 시작하며 이전의 자리에서 한 발짝 나아가 있는 지금 이 순간을 환기한다.

어쨌든 어색하게 “네”를 내뱉으며 앉아있던 스툴에서 일어났다. 벽을 둘러앉고 선 사람들이 맨발로 나란히 걷는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일으킨 두 사람은 공간을 한 바퀴 반 정도 돌더니 나를 폭신하고 길쭉한 흰 베개가 있는 곳에 내려주었다. 곡선으로 잘려져 있는 보들보들한 하얀 카펫 위를 가리켰다.

“여기에 누우셔도 되고, 베개에 머리를 대셔도 돼요. 마음껏 뒤척거려도 돼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일주일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몸이 피곤한 데다가 왜인지 오늘따라 몸이 더 무거웠다. 내 뒤에 누운 사람은 누웠다 뒤척거리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 앉았다. 나도 시선을 끌며 누워 있는 것이 내키지만은 않았지만, 생각보다 아늑하고 편안해 눈을 감았다. 닫힌 눈꺼풀 위로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우리 모두 투명 인간이 될 터였다. 투명 인간이 되기 위해 모였으니까.

귓가에 나긋히 닿는 대사들이 점점 많아졌다. 문이 되고 싶은 사람, 문이 되어 나를 다른 세계로 넘어가게 하고 싶은 사람, 동시에 느껴지는 양가적인 감정을 모두 감각하는 사람, 그 감정을 무시하고 싶지 않은 사람, 어색함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람, 스스로 만들어 낸 어색함과 화살 같은 사람들의 눈길에 못 이겨 쓰러지기도 하는 사람, 허준이 동의보감에 남긴 ‘잡스러운’ 비책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 몸이 보이지 않게 하는 은형법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이 내게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우리 이제 두 발로 일어나요. 은형법에 적힌 경단을 먹으러 가요.”

조금 굵지만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숨을 내쉬듯 말하는 목소리였다. 무리 지어 있던 네다섯의 사람들은 함께 일어났다. 계속 누워있던 나는 조금 비틀거렸지만, 함께 벽을 향해 걸어갔다. 둥글게 서서 한 명씩 경단을 받았다. 동글동글한 구슬 크기의 갈색 경단이 손으로 데구루루 굴러왔다. 모두의 손바닥에 도토리 같은 경단이 놓이자 함께 서쪽을 향해 걸었다. 다른 무리들도 어느 새 곁에 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경단을 입에 넣었다.

“서쪽을 향해 보고 먹어야 해요. 침을 세 번 삼키면 이제 우리는 투명해질 거예요.”

한약도 써서 잘 먹지 못하는데.... 크기는 훨씬 작았지만 왠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저주에 걸린 하쿠를 구하기 위해 치히로가 용으로 변한 하쿠의 이 사이로 밀어넣은 경단이 생각났다. 너무 쓴 나머지 하쿠는 약을 뱉으려하고, 치히로는 그런 하쿠의 입을 온 힘을 다해 끌어안고.... 이로 경단을 으깨자 달짝지근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몇 번 씹으니 침이 고였다. 치히로의 경단은 마법을 푸는 약이었지만, 은형법의 경단은 마법을 거는 약이었다.

“자, 하나.”

“둘.”

“…셋.”

물론 우리는 모두가 보였다. 배꼽이나 척추, 발바닥 같은 곳부터 투명해지기 시작한다고 했지만 아직 서로가 보였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지 않는 척했다. 모두가 손을 들고 골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따라서 몸을 떨고, 누구도 보이지 않는 체했다. 서로가 보이지 않기로 믿었으니, 나 역시 누구도 보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투명해지는 것은 편안한 감각이었다. 나는 있었고, 있지 않았다. 나는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보이지는 않았다. 누구도 어떠한 판단에도 노출되지 않았고, 어떠한 모습으로도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 놓고 투명해질 수 있는 곳은 안전하게 느껴졌다. 이제 손과 발까지 모두 투명해져 우리는 조금씩 섞이기 시작했다. 모여 춤을 췄다.

“우리 춤을 춰요. 아무도 당신을 볼 수 없어요.”

베개와 그물 천을 몸에 감고 공기를 만지며 춤을 추는 무리를 지났다.

“우리 몸은 부자연스러운 거예요.”

손목을 뒤로 구부렸다가 펴고 발바닥을 튕기며 돌았다.

“헛것이 되고 싶은 적이 있나요?”

몸을 아주 빠르게 흔드는 두 사람을 지났다.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하네요.”

빛이 점차 밝아지자 다들 춤추기를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대부분이 처음에 앉아 있던 곳에 앉았지만, 다른 사람이 되어 온 것 같았다. 이제는 한층 가까워진 상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눈을 마주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공간에 들어가면 그 공간에 내 주파수를 맞춰야 해요. 공간마다 공간이 가진 주파수가 있잖아요.”

나는 반년 전에 이 공간에 와 본 적이 있고, 미생물이 유영하듯 시작해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듯한 퍼포먼스를 보며 감격했지만 무거운 코트를 입고 히터의 열기를 견디며 졸음을 참느라 그 안에 있는 모두에게 영향을 줄 만한 실수를 한 적이 있는데,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 그때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이 공간은 관객과 퍼포머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공연의 구조로 짜여 있어서 처음에는 그 엄밀함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구조를 저희에게 맞게 조금 바꾸고 나서는 주파수를 맞추는 게 조금 편해졌어요.”

앉거나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까보다 조금 더 편하게 누워 쉬는 사람이 있었다. 먼저 자리를 뜨는 사람에게는 함께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나는 투명해졌던 몸이 조금 보인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딘가는 아직 반투명하게 남아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투명해질 수 있는 비밀이 몸에 몰래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이제 어디에서든 조금은 투명해질 수 있는, 헛것이 되어 춤을 출 수 있는 전수자가 된 듯했다. 이들이 내게 해준 것처럼 이 춤을 누군가와 함께 추며 나누리라 다짐했다. 은형과 춤의 비의를 전승하기로. 그것이 내가 오늘 받은 것이었다.*

*<투명인간이 되든, 춤을 추든>, 혜진장댄스 He Jin Jang Dance, 2023 Platform-L Live Arts Program, 2023년 8월 12일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