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한 가지 노래에 꽂힐 때가 있다. 출퇴근 길에 한 곡 반복을 하고, 가끔은 애인을 앉혀 놓고 핸드폰으로 반주를 틀어 불러 주기도 한다. 최근에도 그런 노래가 하나 있었다. 아직 꽂힌 기간이 끝나지 않은 그 노래의 제목은 ‘찻잔’이다. 1979년에 노고지리가 불렀다.

욕망에는 그 크기가 어떻든 평소라면 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저지르도록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찻잔’을 노래방에서 부르고 싶다는 것이 그 욕망이라는 데 있었다. 좀 더 귀하고 의미 있는 욕망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물론 나의 몸은 그렇게 설계되지 않았다— ‘어떤’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욕망의 성질이 아니다. 그리고 욕망은 술과 함께 일 때 실행력이 배로 강해진다.

최근 담당하게 된 행사의 뒤풀이 자리였다. 올해 신설한 데다가 다른 프로그램들과 동시에 진행해야 해서 어려움이 있었지만, 잘 운영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만나보고 싶었던 게스트를 초청하여 진행한 행사가 무르익은 여름 밤의 분위기처럼 아름답게 끝나는 바람에 기분이 굉장히 좋아졌다. 고객들이 모두 돌아간 뒤, 협력 업체 소장님과 직원 몇 명이 남아 협찬 받은 샴페인을 가득 채운 잔을 연달아 부딪혔다. 아름다운 사옥을 자랑하는 협력 업체의 안뜰 테라스가 딸린 키친에 둘러 앉은 채였다. 테라스로 연결되는 폴딩 도어가 활짝 열려 있어 간간히 부는 바람에 늦여름의 열기가 식지 않은 채 실려왔지만, 아이스버킷에 담겨 있던 샴페인은 시원하고 청량했다.

동료들이 점차 사라지고, 얼음이 녹으며 새어 나온 물기가 테이블 위에 흥건했다. 테라스에 심긴 3층 높이의 나무에 앵두전구가 빼곡히 걸려 있었다. 냉장고에서 와인이 한 병 나왔을 때, 어김없이 각자의 영화 취향이 테이블 위에 올랐다. 나는 혀가 꼬인 상태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제대로 발음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다 아마 최근 아껴두었다 보았던 영화 ‘경주’에 대해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경주에요, 노고지리의 찻잔이라는 노래가 나오는데. 제가 이 노래를 정말 원래 좋아하는데. 이걸 부르더라니까요. 전곡을 다요.

다음 기억은 노래방에서 그 노래를 열창하는 내 모습이었다. 챙겨왔던 짐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앞장 섰던 것 같기도 하다. 끝까지 함께 있었던 동료에게 듣기로는 내가 문을 닫으려는 코인 노래방 주인에게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세우고 왼손으로 받친 채 ‘저희 한 곡만 부르면 안될까요. 딱 한 곡만하고 집에 갈게요. 제발요.’하고 애원했다고 한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우리는 연남동을 돌아다니며 밤새 영업하는 노래연습장을 찾았다. 찾지 못했다면 동료가 길에서 유튜브로 찾은 MR을 틀어주었을 텐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군데를 찾아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었다. 나는 노고지리의 ‘찻잔’을 부르고, 이은하의 ‘미소를 띄우며 떠나가는 그 모습처럼’도 불렀다. 아마 산울림의 ‘회상’도 불렀을 것이다…. 동료와 거래처 소장님이 부르는 노래는 모르면서 따라불렀다. 검지 손가락을 세운 팔을 열심히 흔드는 채였다.

다음 날 오전은 호텔에서 하는 행사로 외근이었다. 택시에서 쪽잠을 잤다. 호텔에서 나온 도시락이 반도 들어가지 않았다. 스테이크는 퍽퍽했고, 입에선 연어 비린내가 사라지지 않는 것 같았다. 팀장님이 왜 이렇게 안 먹냐고 묻는 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아 배가 부르다고 대답했다. 겨우겨우 행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했더니 동료 덕에 이미 소문이 다 났다. 몇몇이 웃음을 참으며 괜찮냐고 물어왔다. 아뇨, 안 괜찮아요... 동료들 앞에서는 계속 기억이 안나는 척 하고 있다. 내 덕에 잠시 즐거웠다면 그걸로 됐지 뭐...

‘찻잔’은 강릉 여행에서도 한 번 들었다. 강릉 여행의 첫 날은 친구들 중 일부만 먼저 가서 대관령음악제의 한 프로그램을 감상하기로 했다. 콘서트의 여운을 이어 클래식을 듣다 한참 별을 보고 돌아오면서는 한국 가요를 듣게 되었다. 검은 붉고 거대한 달이 떠 있었고, 가만히 보다 노고지리의 '찻잔'이 생각난 것이다. 기묘하게 불그스레한 달빛과 인적이 드물고 오래된 거리를 지나면서 듣는 '찻잔'은 우리를 잠시 침묵에 빠지게 했던 것도 같다. 둥그런 달이 구름 사이로 일렁였다. 그러니까 그 기억은 강렬히 무의식에 남았다. 제발 한 곡만 부르게 해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서울로 돌아와서는 줄곧 노래방에서 '찻잔'을 부르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노래방을 가자고 했는데, 가게 되지 않았다. 갈 시간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가게 될 줄은 몰랐지. 하지만 소장님도 O씨도 즐겁게 계시다 들어가셨지요? 정신을 차리고 사무실에서 소장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제 협조해주신 덕분에 저희 행사 성황리에 잘 끝난 것 같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고, 곧 다시 뵙겠습니다.” 답장이 왔다. “^_____^”

평소에도 즐겨 듣긴 했지만 요즘에는 7-80년대 노래를 주로 듣고 있다. ‘찻잔’ 만큼이나 좋아하는몇 개의 노래를 제외하면 크게 가리지 않고 뮤직 스트리밍 플레이어가 틀어주는 대로 즐기는 편이다. 개인마다 취향에 꼭 맞는 곡을 선곡해주는 DJ가 있는 시대라니 멋지기만 하다. 기술의 발달에 새삼 감탄하고 있자면 갑자기 트로트가 흘러나온다. 한 때는 트로트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애절한 감성을 아주 잃지는 못한 듯 하다. 언젠가는 한국 가요를 부르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 그렇든 말든 이렇게 슬쩍 끼워넣는다고 내가 지금 트로트를 들을 줄 아냐고 알고리즘을 가소롭게 생각할 때 쯤이면 어느 새 ‘천만송이 장미’가 흘러나오고 마는 것이다. 가끔 사람을 소름돋게 하는 알고리즘을 신뢰하는 편인 듯 하다. ‘찻잔’도 사실 알고리즘의 추천 덕에 알게 된 노래였다. 알고리즘은 이제 사람을 밤 새게도 하고, 빌게도 하고, 또….

‘찻잔’은 가사가 아름답다. 찻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찻잔을 부른다. 일곱 행의 가사가 네 번 반복된다. 후렴같은 세 줄은 다섯 번. 찻잔이 가진 온기마냥 은근하다. 가만히 온 몸에 차를 ‘담고’ 앉아 손끝에 다정히 ‘정’을 전해주는 따뜻함.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처음 만난 사람과 노래방에 가서 밤을 새는 걸 보면 조금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나로서는 ‘다소곳이’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따뜻함을 가만히 품고 있기 보다는 ‘저기요, 혹시 저랑 차 한잔 하실래요?’가 먼저 입 밖으로 튀어 나오는 것이다. 될 수 없기에 갈망하는 법일지도.

누군가에게는 이 온도가 지나치게 뜨거울수도, 어떤 이에게는 아플수도 있었을 것이다. 최근에는 누구나 나처럼 그 뜨거움을 우선 끌어안고 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찻잔은 될 수 없지만 찻잔이 앉았던 자리 정도는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그 입속으로 꿀꺽 넘어가는 뜨거운 에스프레소가 되고 싶은 것 같지만.

차를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경주’를 보면서 차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잎을 우린 차를 마시거나 대접하기 위해 마주 앉고, 잔을 데우고, 잎을 씻고, 알맞은 온도로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배우고 싶다. 다도를 배우면서 적정 온도에 나를 맞추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보이차는 한 팩에 200만 원이나 한다는데, 당분간은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티’라도 우려 먹어야겠다. 어쩌면 대신 ‘경주’를 한 번, 아니 몇 번을 더 볼지도. C코드만 기억나는 기타로 ‘찻잔’을 연습해 볼지도. 뜨거운 기억을 글로 써 발송해 볼지도. 그 중 몇 가지는 이미 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