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3층 높이까지 뻗어 나온 가지에 대추가 대롱대롱 달렸다. 대부분이 아직 연녹색으로 달랑거리고 있지만, 개중 몇몇은 벌써 붉게 물들어 쪼그라들었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땅에 떨어져 깨진 은행 열매를 발견했다. 올해도 보도블럭 가득히 지독할 것을 예고라도 하듯이 냄새가 한 발 먼저 코를 찌른다. 아직 능소화가 채 다 지지도 않았는데 숨막히게 푹푹 찌던 여름이 지나가고 있는지 아침 저녁으로 몇 줄기의 선득한 바람이 섞여 분다. 능소화의 꿀에는 독성이 있다고 한다. 처음 채취했을 때는 독성이 없는데, 48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독성이 생긴다. 48시간이라는 유예기간이 지나기 전에 꿀을 먹어 버리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독성이 생길 위험을 부담해야 한다.

독성이 있는 식물들을 좋아한다.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생명일지라도 자기 방어가 가능한 형태로 진화한 것이, 그 지난한 세월이 작고 가는 독성에 응축되어 있다는 것이, 또 생존을 위한 삶이라는 것이 지독히도 가엾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결실을 이루어 낸 것이 경이롭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독성이 있는 식물 중 하나로 여뀌가 있다. 얼마전에도 집 근처 공원에서 밤산책을 하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물가에 핀 여뀌를 보았다. 물가에 피는 풀들로 조경을 하는 와중에 씨가 묻어왔을까. 가만히 서 흔들리는 여뀌를 한참 바라보았다. 2년여 전 왼 발목에 여뀌를 새겼기 때문에 예기치 못하게 다시 만난 것이 새삼 반가웠던 것이다.

여뀌라는 식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당시 교육에 관심은 많지만 넉넉하지는 않았던 부모님은 나를 간판도 없이 ‘독서학교’라 불리는 작은 학원에 보냈다. 책을 읽고 후속 활동을 하는 작은 교습소 같은 곳이었다. 어린이 책상을 U자 형태로 붙여 놓은 작은 강의실 바깥에는 어른 허리 아래 높이의 책꽂이들이 벽면을 두르고 좁은 길을 만들었다. 학원 안쪽에는 벽을 가득 채우며 서 있는 책꽂이에 책들이 서로를 덮고 덮은 채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학원을 다니던 몇 안되는 아이들은 책꽂이 사이를 달리다가도 멈추어 서서 신중하게 책을 골랐다. 언제든 읽고 싶은 책 7권씩을 짙은 개나리색 학원 가방에 가득 담아 빌려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서학교의 유일한 선생이자 직원인 원장은 매일같이 각설탕을 두 개 넣은 커피를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 마셨기 때문에, 책상 위에는 각설탕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원장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 책으로 덮여 거의 표면이 보이지 않는 책상 앞 낡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때만해도 건물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공공연했다. 학원비를 결제하러 학원에 들르는 부모들은 그런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탐탁치 않아 했지만, 우리는 빨간색 띠를 두른 종이에 포장된 각설탕들을 까먹으며 담배 냄새 맡는 것을 몰래 즐기곤 했다.

평소에는 학교라 이름 붙은 학원 작은 강의실에 모여 앉아 A4 용지에 인쇄된 원고지를 채우며 글을 쓰곤 했는데, 글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던 기억이 많지 않은 것을 보면 그저 무엇이든 쓴다는 것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 곳이었던 것도 같다. 무엇을 배우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워 여기에 다니는 것을 숨기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실은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입매에 은근한 뿌듯함이 감돌았다. 누구도 찾지 않는 은밀한 교습소에서 비밀스러운 기술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가을이 되면 가끔 우리는 학원 건물을 나와 근처 들판으로 향했다. 작은 삼층 석탑을 두르고 피어난 목화밭 속에 뛰어들어가 솜을 땄다. 도톰한 솜을 쥐고 손가락으로 헤치면 검고 단단한 씨 세 네개가 나왔다. 목화밭 옆 작은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널 때 원장이 자줏빛 꽃을 늘어뜨리며 하늘거리는 여뀌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꽃에는 독이 있다. 바위에 돌로 찧어 물에 풀면 물고기가 죽는다. 옛날에는 그렇게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여뀌는 내 영혼 어딘가에 찧기고 짖이겨진 붉은 흔적을 남겼다. 보기만 할 때는 안전하고 아름다운 풍경과도 같은 꽃들이 외부 자극을 통한 상태에서는 완전히 다른 성질로 변한다는 사실이 내 안의 어떤 부분을 이전과는 다른 차원으로 데려간 것 같았다.  엄지 손톱 위 반월보다 작고 짙은 꽃들이었다.

타투 예약을 하기 위해 다시 찾아보면서 여뀌가 한해살이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가의 불안정한 환경에 군락을 이루며 살다가, 물이 불어 휩쓸리면 고사하여 다음 해를 기약해야 했다. 꽃 보다 더 작은 씨가 떠내려 가다 어느 뭍에 다시 닿아 뿌리를 내릴 지 알 수 없는 생이었다. 이십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여뀌를 간간히 만나며 최근에는 사람 인연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연이 닿으면 서로를 알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 적당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는 제멋대로 감상하다가도, 단지 존재하기 때문에 자극을 주고 받으며, 서로가 지닌 깊고 얕은 독성에 노출되어 영향 받을 수밖에 없는 것. 그 피할 수 없는 현상이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얼만큼이든 아주 다른 것으로 변화해버린다는 잔혹한 사실이 끔찍하게 자연스러워 남몰래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럴 때는 다른 뭍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죽음의 형태로서라도 연을 견딜 각오를 하게 되는 것이다. 아주 괴롭지만 그래도.